10월쯤 되면 쓰던 향수가 갑자기 심심해집니다.
여름 내내 좋았던 시트러스가 밍밍하게 느껴지고, 뿌려도 뿌린 것 같지가 않습니다. 향수가 변한 게 아니라 기온이 바뀐 겁니다.
가을에 향수를 다시 고르게 되는 이유와, 무엇을 기준으로 고르면 되는지 정리했습니다.
왜 가을이면 향이 약해지나
향료는 열로 피어오릅니다. 알코올이 증발하면서 향 분자를 공기 중으로 밀어 올리는데, 이 과정이 온도에 직접 영향을 받습니다.
기온 30도 향이 빠르게 퍼짐 · 강하게 느껴짐 · 빨리 사라짐
기온 15도 천천히 퍼짐 · 약하게 느껴짐 · 오래 남음
즉 가을엔 같은 향수가 “약하지만 오래가는” 쪽으로 바뀝니다.
여기에 옷이 더해집니다. 여름엔 피부가 많이 드러나 향이 바로 퍼지지만, 가을엔 니트와 재킷이 향을 가둡니다. 체감 확산력이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계절 전체의 원리는 계절별 향수 선택법에 정리해 뒀습니다.
가을에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① 쓰던 향수를 더 뿌린다
가장 간단합니다. 여름에 2회 뿌리던 걸 3회로 늘리면 체감이 비슷해집니다.
다만 한계가 있습니다. 시트러스 계열은 애초에 지속력이 1~3시간이라, 양을 늘려도 오래가진 않습니다. 더 강해질 뿐 더 길어지진 않습니다.
② 계열을 바꾼다
가을·겨울이 향수를 한 병 더 들이기 가장 좋은 시기인 이유입니다. 여름엔 과하게 느껴지던 계열이 이 시기엔 제대로 맞습니다.
가을에 맞는 계열
| 계열 | 가을에 좋은 이유 |
|---|---|
| 우디 | 건조하고 따뜻합니다. 가장 안전한 선택 |
| 앰버(오리엔탈) | 묵직하고 달큰합니다. 추워질수록 제값을 함 |
| 스파이시 | 계피·후추·카다멈. 체온과 잘 맞습니다 |
| 구르망 | 바닐라·통카빈. 호불호는 갈립니다 |
| 푸제르 | 사계절용이지만 가을에도 무난합니다 |
| 시트러스 | 쓸 수 있지만 존재감이 약해집니다 |
계열별 특징은 향 계열 8가지 정리에 자세히 적었습니다.
처음 가을 향수를 고른다면 우디를 권합니다. 앰버와 구르망은 존재감이 강해서 양 조절에 실패하면 사고가 납니다. 우디는 과해도 덜 불쾌합니다.
가을 향수 고르는 네 가지 기준
① 베이스에 나무가 들어가 있는가
샌달우드, 시더우드, 베티버, 파촐리 — 이 단어가 베이스에 있으면 가을에 잘 맞습니다. 노트표를 베이스부터 읽는 습관이 여기서도 유효합니다. → 잔향이 좋은 향수 고르는 법
② 여름에 “과하다”고 느꼈던 향수인가
이게 실용적인 신호입니다. 여름에 부담스러웠던 향수를 가을에 다시 뿌려보면 딱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 사기 전에 가진 것부터 다시 꺼내보세요.
③ 지속력이 충분한가
가을은 옷과 실내외 온도차 때문에 향이 들쭉날쭉합니다. 지속력에 여유가 있는 쪽이 편합니다. EDT 이상을 권합니다. → 향수 부향률 완전정리
④ 실내에서도 괜찮은가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가을·겨울엔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난방이 들어온 실내는 체감상 여름과 비슷하게 향이 퍼집니다.
밖에서 적당하게 뿌린 양 → 난방 들어온 실내에서 과해짐
바깥 기준으로 뿌리면 사무실에서 과합니다. 한 번 줄이는 게 안전합니다. → 사무실에서 쓸 향수 고르기
실제로 가을에 꺼내는 향수
제가 가진 다섯 병 중 가을용으로 확실한 건 하나입니다.
존 바바토스 아티산 — 공식 계열은 시트러스 아로마틱인데, 제 피부에서는 잔향에서 나무 느낌이 올라옵니다. 그 구간이 가을과 맞습니다.
여름엔 첫 향이 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데, 날이 선선해지면 그 진함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같은 향수가 계절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사례입니다. → 존 바바토스 아티산 리뷰
그런데 조말론은 통념과 달랐습니다
이 글을 처음 쓸 때 저는 조말론 콜로뉴 3종이 가을에 묻힐 거라고 적었습니다. 농도가 낮고 옷이 두꺼워지니 체감이 약해질 거라고요. 위의 계열별 표를 보면 맞는 추론입니다.
실제로는 아니었습니다. 날이 쌀쌀해진 뒤에도 세 병 다 잘 맞았고, 그중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가 가장 잘 어울렸습니다. 뿌리는 횟수를 늘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추론이 틀렸으니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① 약해지는 대신 오래 갑니다
앞에서 적었듯 가을엔 향이 천천히 퍼집니다. 확산이 줄어드는 건 맞는데, 그만큼 휘발이 느려져 잔향 구간이 길어집니다.
여름 확 퍼지고 → 빨리 사라짐
가을 천천히 퍼지고 → 오래 남음
저는 첫 향보다 잔향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가을은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유리한 계절이었던 겁니다. 같은 변화가 사람에 따라 장점이 되기도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 잔향이 좋은 향수 고르는 법
② 아쿠아틱이라고 다 여름용은 아닙니다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를 “바다 향”으로만 보면 여름 향수로 분류하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맡으면 바닷가의 허브에 가깝습니다. 짠기보다 건조한 세이지 느낌이 인상에 남습니다.
건조함은 가을과 맞는 성질입니다. 라벨상 계열이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느껴지는가로 봐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 향수 계열 8가지 정리
③ 농도가 낮은 게 실내에서는 장점입니다
가을·겨울엔 난방이 들어온 실내에 오래 머뭅니다. 이때 농도가 낮은 향수는 과해지지 않습니다. 존 바바토스 EDT는 실내에서 한 번 줄여야 하는데, 조말론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섯 병의 가을 평가
| 가을에 쓰기 | |
|---|---|
|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 | 가장 잘 맞았습니다 |
|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 | 잘 맞습니다 |
| 블랙베리 앤 베이 | 잘 맞습니다 |
| 존 바바토스 아티산 | 우디 잔향이 계절과 맞습니다 |
| 아티산 퓨어 | 계절을 안 가립니다 |
다섯 병 다 가을에 쓸 수 있었습니다. → 조말론 3종 비교
확실히 가을용 우디·앰버 베이스
생각보다 괜찮음 가벼운 콜로뉴 ← 직접 써보고 바뀐 판단
약해지는 건 맞음 순수 시트러스
“가벼운 향수는 가을에 안 된다”는 말은 반만 맞습니다. 확산이 줄어드는 건 사실인데, 그게 단점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첫 향 쪽 사람인지 잔향 쪽 사람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새로 사기 전에 — 확인할 것
가을 향수를 산다고 할 때 가장 흔한 실수는 매장에서 결정하는 겁니다.
가을 계열(우디·앰버·스파이시)은 첫 향과 끝이 특히 많이 다릅니다. 매장에서 맡는 15분으로는 판단이 안 됩니다. 실제로 제가 가진 아티산도 매장에서 맡았다면 안 샀을 향수입니다.
① 시향지로 후보 추리기
② 피부에 2개까지만
③ 나가서 1시간 뒤 판단
④ 가능하면 소분으로 며칠
그리고 가격대가 올라가는 계열이라는 점도 알아두면 좋습니다. 우디·앰버 쪽은 디자이너 라인에도 좋은 선택지가 많으니, 비싼 쪽부터 볼 필요는 없습니다. → 니치 향수와 디자이너 향수는 뭐가 다른가
정리
가을에 향수가 약해지는 건 향수 문제가 아니라 기온 문제입니다. 그리고 약해지는 게 곧 나빠지는 건 아닙니다.
① 가진 향수를 그대로 써본다 대개 이걸로 충분했습니다
② 여름에 과했던 향수를 다시 꺼낸다 돈이 안 듦
③ 그래도 아쉬우면 우디 계열을 하나 가장 안전한 추가
①을 건너뛰지 마세요. 저도 조말론 3종이 가을에 묻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써보니 그대로 쓸 수 있었고 오히려 우드 세이지가 가장 잘 맞았습니다.
확산이 줄어드는 대신 잔향이 길어집니다. 첫 향보다 잔향을 좋아한다면 가을은 손해가 아닙니다.
그리고 실내가 길어지는 계절입니다. 진한 향수는 바깥 기준으로 뿌리면 사무실에서 과해집니다. 한 번 줄이세요. 반대로 농도가 낮은 향수는 이 계절에 오히려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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